직책 없는 중간관리자, 멈춘 사람이 아니라 ‘임무’를 기다리는 사람
서론
조직에서는 나이를 먹었으나 자리를 얻지 못한 중간이 있다.
연륜은 쌓였는데 직책은 멈췄고, 책임은 얇아졌는데 기대는 애매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눈치를 본다. 아래에서는 “일을 안 한다”고 느끼고, 위에서는 “무탈하면 된다.”로 방치한다.
조직에서 이런 적체는 개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자리가 없으면 책임을 설계해야 하고, 권한이 없으면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 직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맡길 일(누가 무엇을 언제까지)이 없어서 정체가 생긴다.
본론
이 집단을 다루는 통념은 대체로 두 가지다. “기회가 올 때까지 버티라”, 혹은 “이미 커브를 돌았다”. 둘 다 생산적이지 않다.
적체는 시간이 해결하지 않는다. 조직이 의도적으로 상황을 만들어야 해소가 된다.
나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면 좋다고 본다.
첫째, 직책 대신 임무를 준다.
임무는 명함이 아니라 문장이다. “품질 A라인 클레임을 8주 안에 절반으로 낮춘다” 같은 문장. 여기엔 작게나마 자원과 권한이 따라야 한다.
사람은 문제를 맡기면 방향을 찾는다. 반대로 자리를 기다리게 하면 속도를 잃는다.
임무는 직책의 축소판이 아니라 중요한 과제의 축약판이면 좋다.
둘째, 승진 대신 기록을 남긴다.
승진 적체의 허망함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느낌에서 온다.
이들에게 요구할 것은 충성심이 아니라 결정했던 기록이다.
어떤 대안을 버렸고,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했고, 어떤 리스크를 감수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짧은 기록문. 직책이 없어도 결정들의 흔적이 쌓이면, 존재감은 역할로 복귀된다.
기록은 스스로를 설득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최소 단위다.
셋째, 후배의 성장을 맡긴다.
‘일잘러’의 정체성은 종종 개인 성과에 묶여 있다. 그러나 리더십의 씨앗은 타인의 성장에서 싹이 틘다.
직책이 없더라도 특정 인력 2~3명의 성장 가속을 임무로 붙여 본다.
체크리스트가 아니라 관찰–피드백–재시도의 짧은 주기, 그리고 “이 사람의 올해 한 줄 변화”를 요구한다. 성장은 숫자 이전에 서사로 기록되어야 한다.
제도적 장치가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핵심인재관리 시스템의 풀(pool)을 열어 이들을 선별하고, 프로젝트 기반 임무를 배정하고, 실패하더라도 복귀의 안전망을 마련하는 최소한의 틀은 있어야 한다. 다만 포인트는 선발–육성–지원의 절차보다, 그 안에서 문장으로 정의된 임무를 실제로 맡겼는가에 있다.
풀에 넣어 두고 손대지 않으면 풀은 무대에 올라가기전 대기실과 같은 꼴이 된다.
짧은 사례(전문가의 시선으로)
한 전자부품 회사의 12년 차 엔지니어가 있었다.
승진 경쟁에서 두 차례 밀린 뒤, 그는 보고서는 정확했지만 앞에 서려 하지 않았다.
회사는 그에게 직책 대신 임무를 줬다. “8주 동안 B라인 ‘미세 불량’의 원인을 찾아 재작업률을 30% 낮춘다.” 부여된 자원은 많지 않았다. 단, 현장 2명 차출 권한과 매주 금요일 30분의 결정 회의가 약속되었다.
그는 데이터 앞에만 서지 않았다. 야간의 미세한 소음, 냄새의 온도, 작업자의 동선을 함께 봤다. 매주 회의에서 그는 한 문장의 결론을 냈다. “이번 주의 포기는 이 공정 변수다.” 여섯째 주, 공정 조건의 미묘한 진동 패턴과 특정 자재의 배치 타이밍이 물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재작업률은 목표를 약간 상회해 28% 감소에 그쳤다.
그러나 그 8주의 기록은 결정의 지도가 되었고, 두 명의 후배는 그 지도를 들고 다음 분기를 더 짧게 돌파했다. 그는 여전히 직책이 없었다. 대신 임무를 수행한 사람으로 불렸다.
조직에서 불리는 이름이 바뀌자, 그의 자세가 먼저 달라졌다.
결론
직책 없는 중간관리자는 방치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자리가 변화를 만든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임무가 사람을 바꾼다.
핵심인재 풀은 그 임무로 가는 문을 여는 장치가 될 수 있다. 풀에 선발하고, 핵심 과제의 단기 임무를 연결하고, 결정의 기록을 남기게 하라.
그러면 “눈치만 본다”는 평판은 “임무를 맡는다”는 신뢰로 치환된다. 승진은 결과일 뿐이다.
조직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직책을 기다리는 시간을, 임무로 채우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적체는 문제가 아니라 예비 전력이 된다